해양의 나라 고려는 500년 역사에서 해군력과 조선술이 발달할 수 있는 다섯 번의 계기를 맞이했고, 잘 활용해 역사의 성공을 이뤘다. 건국자인 왕건은 ‘해군대장’·‘백선장군’의 칭호를 받았을 정도로 뛰어난 제독이었다. 전형적인 해양세력이었다. 그가 초기에 사용하던 큰 배 10여 척은 각각 사방 16보요, 위에 다락을 세우고, 말을 달릴 수 있을 정도였다는 기록이 있다. 사방이 16보라면 20m 정도로 대형 돛대를 몇 개 설치한 큰 함선이다.
고려는 1050년에 전함 23척을 이끌고 초자도의 여진 해적을 공격했다. 1107년에는 육군과 협동으로 해륙양면작전을 벌이면서 북쪽에 있는 여진 해적의 본거지를 공격했다. 동해에서 활용한 이 전투선들은 높고 거친 파도, 편북풍 계열의 바람, 원양항해구역 등 동해의 해양환경과 여진족의 배·무기·전투방식을 고려해 만든 전선이었다. 필시 파도와 폭풍을 견딜 수 있도록 선체가 단단하고, 능파성이 강하도록 크기는 작은 대신 폭이 좁고, 길쭉한 형태에 돛대가 적은 형태였을 것이다. 고려 말에 검선(劍船)이란 이름을 가진 배가 등장하는데, ‘칼(劒)’을 꽂아놓은 것 같은 의미로 보아 기능과 형태는 과선과 유사한 전선으로 추정된다. 결국 이런 배들은 조선시대에 들어와 구선(龜船)으로 발전했다. 이어 이순신에 의해 성능이 개량되면서 거북선이 됐다.
한 예를 들면 서긍이 속했던 송나라의 사신단은 주력선인 2척의 신주와 보좌선인 6척의 객주로 구성됐다. 그런데 객주는 길이가 30m, 높이가 9m 폭이 7.5m이고, 주 돛은 높이가 30m에 달한다. 곡식 2000섬(1섬은 10말)을 실을 수 있었고, 신주는 그 3배에 달하는 거함이었다. 그런데 인도양을 지나 페르시아만을 왕복하는 송나라 배들은 선원이 400~500명에 달하고, 큰 배는 1000명 이상이 승선했다. 나침반을 갖춘 이 배들은 바람이 정면에서 불어올 때를 빼놓고는 어느 방향으로든 갈 수 있었다. 1976년 신안 앞바다에서 발견된 신안 해저유물선은 원나라의 것이지만 송 선박을 그대로 계승했다. 배 밑바닥이 V자형인 첨저선(尖低船)으로, 길이 30여m, 깊이 9m, 너비 5.5m이다. 돛대는 앞뒤로 2개인데, 앞돛은 24m, 뒷돛은 30m이다. 주 돛의 위에는 야호범(野狐帆)이라는 보조 돛을 달았는데, 이는 풍향을 조절하는 용도로 사용됐다.
뒷바람뿐만 아니라 옆바람까지도 이용할 수 있었다. 이렇게 해서 조선술과 항해술 등 해양력을 강화한 고려는 유라시아 세계질서의 중심이 된 몽골과 관계를 맺으면서 그 진가를 발휘하게 됐다.
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